11월의 한라산
실업고를 나와 관련학과에 입학한지라, 고교시절부터 실험에 조금은
능했는데, 인문계 출신 동급생, 특히 선배들은 끊일 줄 모르는
실험 리포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때때로 몇 시간 혹은 며칠이 걸리는
실험을 대신하곤 했다.
게다가 성산포가 집이라, 어차피 하숙이나 자취를 해야 했기 때문에, 실험실에서
기거하며 실험(특히 지도교수의 논문 실험)을 맡아 하는 게 사정상
이래저래 맞기도 했다. 제주대학이 81학번부턴 아라동 캠퍼스로
이전했기 때문에, 허허벌판이나 다름 없는 곳이기도 해서
가을이면 유독히 엌새꽃이 만발했다. 실험실 창 너머 어스름에 물든
엌새꽃은, 비록 멀지는 않았지만, 한창인 나이에서 오는
집생각은 절절했다.
그럴 즈음, 선배가 속한 <산악회>가 겨울산행을 계획하고
있어서, 거의 조르다시피 따라나서게 됐다. 그리고 그 즈음에
대학원생 논문 실험이 '드디어' 끝나서 모처럼 여유가
생겼기도 했다. 난생 처음 맛보는 깊은 산의 눈보라며
정강이까지 꺼지는 눈길 산행의 묘미는, "아! 이대로 천 길 낭떠러지로
곤두박질치는 건 아닌가" 하는 느닷없는 두려움도 덩달아
걸러내야 하는 데서 더 맛갈이 난다.
11월 2일....(계속)
저녁 무렵.....그야 말로, 눈밭의 진수성찬은 그 무엇과도
바꿀 수 없는 '별미'의 연속이었다. 커다란 코펠 두 개에 닭통조림을 너댓개씩
넣은 다음, 시금털털한 김치를 듬뿍 넣고, 파, 마늘, 감자,풋고추,양파를
넣은 뒤에 고추장을 풀어 넣으면 그 향이 일품이라, 먹지 않아도
배가 부를 지경이다. 눈길을 걸어 윗새오름에 오른지라 모두들 허기져 있어서
닭찌개가 읽어 가는 내음이 더 할 나위 없이 군침을 당기는 것이다. 술 한 잔이
절로 생각 나기는 할 때지만, 겨울 산행에서 '술'은 곧 '죽음'이라는
겨울 산사람들의 금기인지라 코펠 바닥의 맛갈 나는 음식을 차지하려는 숟가락질이
소리 없는 전쟁을 한바탕 치르는 것으로 대신한다. 누군가가 가져 간
원두커피의 진한 향을 음미하고 나면, 짙게 드리웠던 안개는 삽시간에
사라지고, 둥근 달이 아� 눈밭을 리튬 가로등처럼 파르스름하니
뒤덮은 설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
11월 3일.....(계속)